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읽는 다양한 관점과 틀이 있다. 그에 따라 평가가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중심이 필요하다. 제주투데이는 정부가 발간한 4·3진상조사보고서와 수차례 동행한 4·3시민사회단체 답사 기록을 토대로 4·3의 핵심적인 인물 10명을 함께 읽고자 한다. 다만, 제주4·3이라는 비극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해결 과정을 살필 때 제주도민을 역사 인식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는 관점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함께 한다.<편집자 주>

전쟁기념관에는 전시된 송요찬 연대장의 패널. 사진 뒤쪽 인물이 송요찬 연대장. 그의 민간인 학살 책임에 대한 설명은 없다.(사진=신동원 제공)
전쟁기념관에는 전시된 송요찬 연대장의 패널. 사진 뒤쪽 인물이 송요찬 연대장. 그의 민간인 학살 책임에 대한 설명은 없다.(사진=신동원 제공)

송요찬, 제주에서 지옥을 펼쳐보이다

박진경 연대장이 암살당한 뒤, 1948년 7월 15일 경비대 9연대가 부활됐다. 11연대와 합편된 지 두 달 만이다. 병력 재편 이유는 무차별 진압의 강도를 높여 당시 제주의 상황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일 것으로 추정된다. 경비대총사령부는 송요찬 소령을 9연대장으로 임명했다. 송요찬은 일본군 준위 출신으로 전투 경험을 쌓은 인물이다. 송요찬은 일본군이 중국인을 대상으로 자행한 만행을 제주에서 동족을 대상으로 벌인다. 제주에서 지옥을 펼쳐 보였다. '살인마'. 제주도민은 그렇게 불렀다.

미군 비밀문서를 통해 확인된 당시 상황을 보면, 미군정은 학살에 사태를 조기에 종식하기 위한 학살에 무게를 둔 것으로 보인다. 학살 작전을 펼칠 연대장이 필요했던 것. "반란이 계속됐으나 이달(6월) 하순 접어들면서 국방경비대 사령관은 '평정이 가시화 되고 있으며, 작전이 더딘 것은 경비대가 오직 학살이라는 수단으로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다'고 밝혔다."(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미군 문서) 이 같은 정황은 미군정이 더욱 무차별적인 작전을 펼칠 목적으로 9연대를 부활시키면서 연대장에 송요찬을 앉힌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국방경비대는 제주도민을 실전 전투 훈련용으로 삼았다

제주도민 입장에서 더욱 비참한 것은, 도민들이 실전 전투 경험이 부족한 국방경비대의 역량 강화를 위한 훈련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미군정은 제주도 사태를 경비대의 전투 훈련용으로 여긴 것으로 볼 수 있는 자료가 있다. "딘 군정장관은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야전훈련을 위해 제주도의 국방경비대 연대들을 교체시킨다는 방침을 갖고 있다. 1개 연대가 제주도에 4~6주 동안 주둔할 것이다. 산간지대에서 항상 연대 훈련이 이뤄질 것이다."(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A Summary Report on the Jei-Ju Police,” from Military Governor Major General William Dean to Korean National Police Director, July 30, 1948.)

송요찬, 제주도지사도 '빨갱이 사냥'

이 같은 상황에서 송요찬은 도민을 무차별 체포하고 처형했다. 직속 부하는 물론, 초대 제주도지사를 상대로도 '빨갱이 사냥'을 벌일 정도였다. 9연대 군수참모를 지낸 김정무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난 9월 1일부로 대위 진급을 했는데 9월의 어느 날 연대장이 부르더니 다짜고짜 '너 재판장 해라. 이 놈을 죽여야 돼!'라고 했습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범죄사실도 모르는 사람에게 덮어놓고 사형언도를 하라는 겁니다. 사관학교에서 군법회의에 대해 몇 시간 배우긴 했지만 재판을 해본 일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요. 재판정에 나가보니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사람이 반쯤 죽어 있었어요. 피고인은 제주도지사였던 박경훈이었습니다. 도지사 관사서 쌀 한 말을 공비에게 줬다는 게 범죄사실이었지요. 쌀 한 말에 사람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이었습니다.”(김정무 증언) 김정무는 사형 대신 3년 형을 언도했다. 박경훈 지사는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자 송요찬은 격노하면서 이들을 구타했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본격적인 강경진압작전을 벌이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본도의 치안을 파괴하고 양민의 안주를 위협하여 국권 침범을 기도하는 일부 불순 분자에 대하여 군은 정부의 최고 지령을 봉지(奉持)하여 차등(此等) 매국적 행동에 단호 철추를 가하여 본도의 평화를 유지하며 민족의 영화와 안전의 대업을 수행할 임무를 가지고 군은 극렬자를 철저 숙청코자 하니 도민의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협조를 요망하는 바이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다음날 제주 해안은 봉쇄됐다. 본격적인 '빨갱이 몰이'와 '빨갱이 사냥'이 시작됐다.

송요찬(1918-1980)
송요찬(1918-1980)

제주 중산간지대 주민들에게 거주지를 떠나라는 소개령이 떨어졌다 해안가로 내려오라는 것이다. 갈 곳 없어 거주지에 숨어있거나 산으로 들어간 주민들은 무장대로 간주됐다. 토벌 작전 대상으로 무장대뿐만 아니라 마을에 거주하는 일반 주민도 포함시킨 것이다.  미군 자료는 9연대의 잔혹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저항을 없애기 위해 모든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유격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 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미군 정보보고서)

무차별 체포한 주민들은 재판도 없이 사살되는가 하면, 살아 남은 이들은 전국 각지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불법 군법회의를 통해 수 많은 도민들이 처형당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예비검속으로 인해 집단 사살되기도 했다. 행방불명된 희생자가 3000명에 이른다. 제주도경비사령관까지 맡으면서 진압군 총책임자로 이 같은 민간인 희생을 야기한 송요찬의 말로는 어땠을까.

1948년 10월1일 제주 삼성혈에서. 왼쪽부터 제9연대 송요찬 연대장, 김영철 해안경비대 참모장, 정일권 경비대 총참모장. (사진=제주4·3진상조사보고서(김정무 장군 소장))
1948년 10월1일 제주 삼성혈에서. 왼쪽부터 제9연대 송요찬 연대장, 김영철 해안경비대 참모장, 정일권 경비대 총참모장. (사진=제주4·3진상조사보고서(김정무 장군 소장))

'반헌법행위자'로 지목된 송요찬

송요찬은 한국전쟁 때는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에 대한 총살을 명령한 인물로도 꼽힌다. 당시 충청남도와 충청북도 지역 일원에서 수 만명이 한국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된 후 암매장되었다. 1959년 육군참모총장, 5.16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국방위원장, 외무부장관을 맡은 뒤 내각수석 장관에 임명된다.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위원회는 4.3 당시 민간인 학살 사건과 관련 학살을 지시 또는 적극 수행한 인물로 송요찬을 올렸다. 그런가 하면 한국전쟁 전과 등을 이유로 그를 기리는 사업을 추진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2017년 충남 청양군에서 송요찬의 생가, 동상, 비석 등을 복원 및 정비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이에 4.3 관련 단체들이 강하게 항의하면서 철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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