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읽는 다양한 관점과 틀이 있다. 그에 따라 평가가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중심이 필요하다. 제주투데이는 정부가 발간한 4·3진상조사보고서와 수차례 동행한 4·3시민사회단체 답사 기록을 토대로 4·3의 핵심적인 인물 10명을 함께 읽고자 한다. 다만, 제주4·3이라는 비극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해결 과정을 살필 때 제주도민을 역사 인식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는 관점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함께 한다.<편집자 주>

왼쪽 조병옥 경무부장, 오른쪽 김익렬 9연대장(사진=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자료)
왼쪽 조병옥 경무부장, 오른쪽 김익렬 9연대장(사진=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자료)

조병옥이 경찰총수가 됐다...친일 경찰은 기세등등했다

제주4·3 당시 민간인 학살의 원흉 중 하나로 당시 조병옥이 거론된다. 그는 해방 후 초대 경찰총수가 되었다. 경무부장이 된 뒤에도, 그는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한 경찰 조직을 쇄신하지 않았다. 심지어 노덕술 같은 인간도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으로 기용할 지경이었다.

노덕술은 일제에 적극 협력하며 독립운동가를 대상으로 모진 고문도 가했던 악질 친일 경찰이다. 해방 이후 평양경찰서장을 맡고 있다 친일 행적으로 인해 처형당할 위기에 있던 노덕술은 남쪽으로 내려왔다. 한 자리를 차지한 뒤 그는 악행을 계속 이어갔다. 이런 예는 비단 노덕술 뿐만이 아니다.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 경찰들은 기세등등했다. 조병옥은 그런 친일 경찰들의 든든한 뒷배였다.

민간 시위대 향한 경찰의 총격은 정당했다는 조병옥

1947년, 제주도민은 3·1절 기념대회를 열었다. 3만 명이 모인 대규모 집회였다. 해방됐다지만 미군정 치하 도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군중은 통일독립을 요구하며 친일파 처단, 부패 경찰 추방을 외쳤다. 기마경찰의 말에 어린아이가 치였다. 이에 군중이 항의하자 경찰이 발포했다.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는 경찰에 대한 반감을 더욱 키웠다. 도민은 9일 뒤인 3월 10일부터, 유례없는 규모의 민관 합동 총파업을 단행한다. 공무원, 학교 교사가 파업에 참여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찰 내부에서도 자성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중문지서 경찰관 6명이 항의의 뜻을 밝히며 사직서를 냈다. 파업에 동참한 현직 경찰도 있었다. 이후 66명의 경찰이 파면된다.

사태가 심화되자 14일 조병옥이 제주에 내려온다. 경찰총수로서 사과하기 위해서? 아니었다. 조병옥은 제주도민을 향해 다음과 같이 포고했다. “제주도의 동포제위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경비상 만전대책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기만적 선전과 파괴적 모략으로써 제주도의 사회를 무질서 상태에 빠지게 하였고, 빠지게 할 근본적 요소를 제거할 근본방침도 수립되어 있다. 도정 책임자와 협의하여 그 실현에 옮기겠다. 바라건대 동포제위는 안심하기를, 그리고 경찰과 협력하여 제주도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를, 폭동과 같은 무질서의 행동같이 조선건국의 전도를 위험케 하는 것은 없다.” 사과는커녕 ‘근본적 요소를 제거할 근본방침’ 운운은 협박에 가까웠다.

조병옥은 제주도청에서 파업중인 공무원들을 만나 파업 중지를 요구했다. 당시 공무원은 조병옥이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고 증언했다. 빈 말이 아니었다. 서울로 돌아간 조병옥은 제주 3·1절 기념식에서 시위 군중을 향한 발포한 사건의 책임 여부에 대해 “당시에 존재한 제 사정으로 보아 치안유지의 대국에 입각한 정당방위로 인정함”이라고 발표했다.

조병옥이 경찰총수로서 3·1절 시위 군중을 향한 총격이 정당했다는 입장을 개진한 뒤,  경찰은 더욱 강경하게 나섰다. 이후 총파업 관련 도민들을 검거하고 연행하면서 구타와 고문까지 자행했다. 주로 육지에서 대거 투입된 경찰이 취조를 맡았다. 검거자가 너무 많아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칠 교사가 부족했다. 새로운 교사로 채워야 할 지경이었다.

경찰의 탄압...무장봉기로 주요 원인이 되다

이와 같은 경찰의 강경책은 도민의 반발을 샀다. 경찰에 대한 분노는 이듬해 4·3 무장봉기의 주요 요인 중 하나가 된다. 1948년 4·3 무장봉기가 일어난 후 5월 5일, 군과 경찰 수뇌부들이 제주에서 다시 모였다. 비밀회의가 열렸다. 무장대와 평화협정을 맺기도 했던 김익렬 9연대장은 경찰의 강경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귀순 독려와 무력 위압을 병용하며 불필요한 인명 살상을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조병옥은 오히려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갔다. 분노한 김익렬은 조병옥에게 달려 들었고 몸싸움을 벌였다. 이후 상황은 조병옥의 뜻대로 흘러갔다. 다음날 9연대장은 김익렬에서 박진경으로 바뀐다. 미군정은 강경정책을 펼치며 경찰과 군, 그리고 ‘청년단’으로 위장한 정치 깡패들이 합세해 초토화작전을 펼치며 제주 섬에 피비린내가 진동하게 된다.

조병옥, 철거되다

이후 남한 단독정부가 들어선 뒤 조병옥은 정치에 발을 들인다. 한국전쟁 때는 내무부 장관에 취임한다. 195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뒤 1960년 대통령 선거에도 도전하지만, 후보 등록 후 위병 수술을 한 뒤 후유증으로 심장 질환이 발병해 사망한다. 사망 뒤 그의 행적에 대한 논란이 줄기차게 일었다.

충남 천안시 병천면에 위치한 아우내독립만세 기념공원 내 '그날의 함성'. 붉은 동그라미 안이 조병옥씨라는 논란이 일고 있는 동상. (사진=김동엽 천안시민리포터 블로그)
충남 천안시 병천면에 위치한 아우내독립만세 기념공원 내 '그날의 함성'. 붉은 동그라미 안이 조병옥씨라는 논란이 일고 있는 동상. (사진=김동엽 천안시민리포터 블로그)

특히, 2021년 충청남도 천안시 아우내독립만세 기념공원 내 조형물과 관련해 일었던 논란이 대표적이다. 유관순 열사와 함께 만세 운동을 외치던 군상을 표현한 설치물이다. 천안시가 지난 2009년 조성했다. 2019년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는 동상 중 한 인물이 조병옥과 매우 흡사하다며 철거를 촉구했다.

조형물을 만든 작가는 조병옥을 모델로 참고했다고 밝혔다. 아우내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 한 사람인 조인원 선생을 참고하려다가 사진이 없어 그의 아들인 조병옥의 사진을 참고해 제작했다는 것이다. 현재 조병옥 동상은 철거된 상태다.

지난 2018년에도 서울시 강북구청이 추진했던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15인 흉상 건립사업에 조병옥씨 동상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자 4·3단체들이 반발해 중단한 바 있다. 

양윤경 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장과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 관계자들은 1월 10일 강북구청을 항의 방문했다. 강북구청이 추진하고 있는 흉상 건립 사업의 대상인 건국훈장 수여자 16명 중에 4.3민간인 학살의 주요책임자인 조병옥이 포함돼 철회를 촉구했다.(사진=제주4.3희생자유족회)
양윤경 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장과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 관계자들은 1월 10일 강북구청을 항의 방문했다. 강북구청이 추진하고 있는 흉상 건립 사업의 대상인 건국훈장 수여자 16명 중에 4.3민간인 학살의 주요책임자인 조병옥이 포함돼 철회를 촉구했다.(사진=제주4.3희생자유족회)

 

조병옥 略史

1894년 5월 21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에서 출생. 1945년 10월 21일 경무국장에 취임한 뒤, 1946년 1월 16일 초대 경무부장에 취임. 1950년 7월 17일 내무부 장관 취임.  1954년 5월 제3대 민의원선거 당선. 1960년 2월 15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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